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4. 10. 23:58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기계다

졸업앨범의 사진이 나온 날은
, 반 아이들의 3분의 2 쯤이 불만을 터뜨리기 십상 이었다.  미숙하므로, 오히려 자신에 대한 순진한 환상이 살아있는 시절, 중학교 졸업반쯤의 계집애들에겐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학교 지정 사진관의 사진사 아저씨에게 아이들은 입을 삐죽이며 항의하곤 했다. 사진 속의 얼굴이 바보같아 보인다거나 살이 쪄 보인다거나, 아니면 살쾡이 같아 보인다거나... 그런 끝없는 종알거림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 버린 아저씨의 대꾸는 언제나 한가지였다.
"사진은 기계가 찍는 거야.  기계가 거짓말하는 것 봤어?"
아마도 아저씨는 열대여섯 살 나이의 계집애들에게 외교적 언사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게다.  따라서 아저씨의 그 무자비한 단언은 꽤나 효과가 있었다.

그 말은 "기계"에 대한 확고부동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카메라"는 즉 "기계"이며, "기계"는 오직 "있는 그대로" 만을 찍어낸다는 것-그것은 의심해서 도 안되고, 의심할 수도 없는, 신성불가침의 믿음을 전파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의심하는 능력이, 인간이 가진 수많은 능력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것이며, 가장 탐구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이제는 이미 어리지 않은 어른들 또한, 카메라라는 그 "기계"의 권위에 감히 도전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텔리비젼 방송국에서 일을 하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이야말로 그 권위에 대해 가장 도전적인 사람들이다.  나 또한 그 불경한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 옛날 사진관 아저씨 못지 않게 단호한 어조로 다시 말하면 이렇다.

카메라라는 기계는 "거짓말을 한다.".  그 기계는 "있는 그대로" 찍지 않는다.
그 기계를 믿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기계"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맨은 작가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영상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 여기 한 사람의 노인을 카메라로 포착한다고 하자. 그를 "있는 그대로" 어떻게 찍을 것인가?  노인은 지금 막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라고 글로 쓰기는 쉬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작가라면 이 한 문장을 써놓고 다시 잠깐 망설일 것이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니. 어떻게 물었단 말인가?
 망연히?  무심하게? 흐뭇하게? 아니면 초조하게?  기타 등등이 "지금 막"과 "담배 한 대"사이에서 마구 오락가락 할 것이 뻔하다.  수식어 하나라도 작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 노인이 현재 처한 정황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마음속으로 믿고 의지해왔던 아들이 가출을 해 버린 상황이라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것이 "망연히"가 될 것인가 "허탈하게"가 될 것인가? "분노를 억누르며"가 될 것인가?  역시 간단하지가 않은 문제이다
.

그럴 때, 그 노인이 어떻게 담배를 피웠는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만드는 것은, 작가가 그의 상상력 속에 떠오른 노인의 표정을 어떤 단어에 더 어울리게 느끼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작가가 "망연히"로 결론을 내렸다 해서, 그 노인이 진실로 "망연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작가의 의지가 그 단어를 선택했고
, 한 인간이 가지는 무한히 섬세한 표정을 그렇게 해석했을 따름인 것이다.

그것이 글의 한계라고 누군가는 너그럽게 말할 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은 쉽게 신뢰받는 경향이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라면
, 카메라 뷰화인더로 다시 한번 앞의 노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면, 당장 카메라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부터가 문제다. 정면인가? 뒤통수인가? 몽골리안의 특징이 현저하게 살아있는 저 펑퍼짐한 코의 선을 살린 측면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떻게 찍어야만 저 노인의 실체를 실체 그 자체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 도대체 실체란 무엇인가..

노인의 얼굴은 무표정에 가깝다. 밝은 표정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담배 연기만 하얗게 살아 오르는 롱샷의 실루엣으로 처리하면? 그것은 얼마나 적막해 보이겠는가? 그러나 그가 정말 적막한가?   따스한 볕을 즐기며 낮잠 자는 강아지에서 노인으로 팬 하면?  무척 한가로와 보이겠지?  그러나 그가 정말 한가한가?  
꽁초가 가득한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비벼 끄는 손을 클로즈업한다면? 그러나 그가 정말 신경질이 나 있는가?

"있는 그대로"의 사람이 바로 코 앞에 있어도 영상으로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보여 준다는 것은 글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앵글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그 각각의 영상은 각각의 다른 느낌을 거느리게 마련이다. 그 느낌이 곧 영상 자체가 가지는 말이다.  하나의 사실을 두고도 영상은 각각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노인이 담배를 "어떻게" 피우는 가를 전하기 위해서는, 카메라를 든 사람도 결국 자신의 말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선택은 자신의 피사체와 그 정황에 대한 깊은 통찰 끝에 이루어질 것이다.  때문에 카메라맨도 작가일 수밖에 없으며
, 카메라라는 그 기계가 "있는 그대로"를 찍는 다는 환상을 그 누구 보다 철저히 불신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단 한 컷의 영상도, 찍는 이의 의지가 개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고로, 카메라 바깥에 있는 삶의 총체적인 진실은, 카메라 아이를 통과하면서 그 카메라를 조작하는 이의 선택적 진실로 변모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상은 현장에서 "발견"하는 영상인 것이다."있는 그대로"라는 환상 내지 강박증후군에 가장 심각하게 시달리는 분야가 바로 다큐멘터리다.  드라마의 영상작업은 상상 속의 공간을 현실 공간에 재현하는 성격이므로, 영상을 만든다고 표현해도 별 저항감이 없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지금 여기 있거나, 일어나고 있는 사실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기에 "만든다"는 표현이 웬지 거북살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 영상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영상 담당자는 드라마의 경우보다 오히려 더 창조적일 필요가 있다.  드라마에는 요구받는 장면이 분명하고, 그 장면의 정황과 분위기와 감정에 대한 기본적인 텍스트가 나와 있다.  따라서 준비된 영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늘 살아있는 현장을 대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는 촬영 콘티 자체가 드라마 대본보다는 훨씬 느슨한 것이기 쉽다.

다큐멘터리 영상은, 사전에 어느 정도 예측을 한다고는 하나, 궁극적으로는 현장에서 "발견"하는 영상인 것이다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사건 혹은 현상 가운데서 어떤 상황을 포착하느냐, 그 사건 혹은 현상을 어떤 앵글로 표현하느냐는, 그 순간의 그 그림을 어떻게 발견하느냐의 문제다.  한 순간 분명히 존재했던 무엇-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의 뒤안길로 흘러가버렸을 그 무엇-을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나 표정일 수도 있고,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사물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만 가능했던 어떤 실재를 카메라가 사로잡음으로서 비로써 그것은 그림으로 의미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발견은 공짜가 아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철저한 탐구와 동의를 거친 후에야 카메라의 발견은 방향성을 지니게 되는 까닭이다.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 카메라가 의지를 가질 때 그것이 담아낸 영상은 비로소 "말"을 한다.  그때야말로, 다큐멘터리의 영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그 어느 분야보다도 카메라가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이다.  구성이나 해설 이전에,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카메라가 먼저 발언의 주체가 되고, 또 되어야 하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속성이므로...

단지 아름답기만 한 영상보다 그렇게 스스로 "말"하는 영상들을 만날 때 작가는 행복하다.  그럴 때는 편집을 한다는 것도 흩어진 채 있는 형상의 말들을 문장의 순서에 맞게 자리매김 해 주는 일일뿐이며, 해설을 쓴다는 것조차도 그것이 지닌 말들을 읽어내어 옮겨 쓰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상 가는 축복이 어디 있으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가 프로듀서건, 카메라맨이건, 작가이건 간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 어떤 영상의 말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영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려는 사람들은 뒤집어 말하면, 영상으로 자신의 말을 "만들려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 어떤 현장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발견하고자 고군분투 한다는 뜻이다.

그 "어떻게"를 잡아내기 위해 카메라맨과 프러듀서는 중무장을 하고, 어떻게 발로 뛰었으며, 얼마나 끈질기게 기다렸는지 하는 것은, 그러나 실은 중요하지 않다. 과정이 힘들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빛나는 것은 아니다. 그 스스로 말을 하는 영상을 잡아내야만 프로그램이 빛나는 까닭이다.

( 이 글은 방송작가이신 김옥영님의 글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