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Elephant Man>, <Half Ton Mum>, <The Girl With Eight Libs)> 최근 영국 채널4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바디쇼크(Bodyshock) 를 통해 방영된 작품들의 제목들이다. 말 그대로 충격적인 육체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 육체 다큐멘터리류는 대부분 충실한 시청률을 보장해 준다. 방송을 보는 사람들의 입맛을 충실히 반영하는 일상의 재미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의 소재와 구성이 바뀌어가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타블로이드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더 선(The Sung)≫, ≪뉴스 오버 더 월드(News of the World)≫로 대표되는 영국의 가십성 타블로이드 신문의 헤드라인들은 가끔 유치하지만 재치 넘치고, 기발한 경우가 많다. 이제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시청자의 손길로 인해 영국 방송 프로그램도 타블로이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분석이 많다. 물론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다큐멘터리의 산실인 영국에서 이러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걱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타블로이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존재하는 것도, 정확하게 구분을 지을 수 있는 잣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타블로이드 다큐멘터리라는 분류가 현재의 시류를 반영하는 다큐의 형식적 변화 패턴을 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보통 타블로이드 신문은 저급하게 가십거리에만 매달리는 신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영국의 타블로이드지는 독자의 가려운 곳을 충실하게 긁어주고, 종종 편향적이지만 논리 정연한 사회 의식을 담고 있다. 객관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과격한 헤드라인은 일반 서민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사회적 불만을 대변해준다. 물론 페이지3걸이나 연예 가십, 음담패설 등을 통해 직설적 쾌감을 제공하기도 한다. 타블로이드 신문에서는 ≪타임즈≫나 ≪가디언≫지을 볼 때와 같은 지적인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방송, 특히 다큐멘터리가 타블로이드화된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거시적으로는 방송을 보는 사람들의 입맛을 충실히 반영하는 일상의 재미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의 소재와 구성이 바뀌어가는 것이다. 시장의 논리에 충실한 것이다. 전통적인 신문 보다 작은 크기로 제작되어 공공장소에서 휴대하기 편하고, 손에 쏙 들어올 수 있는 형태로 제작된 타블로이드 신문은 서민들의 일상 관심사를 담아내는 신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도도하고 콧대 높은 ≪타임즈≫, ≪텔레그라프≫와 같은 기존 정론지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해 왔다.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로, 전 국민적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인 가치와 정보를 강조하는 교육적 취지의 프로그램과는 달리 상식에 호소할 수 있는 소재를 파고들어 일상 속 파격을 꾀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 타블로이드 다큐멘터리의 특징이다. 다큐멘터리와 시청자의 관계가 상하 관계의 '교육적' 이미지를 벗어나 시청자와 이심전심의 수평적 관계로 바뀌어가는 것이 다큐멘터리의 타블로이드화가 지닌 또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이는 전통 엘리티시즘의 파괴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방송사들의 다큐멘터리 편성, 기획자들은 이러한 타블로이드화를 단순한 방송의 저급화 현상과 동일시 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시청률을 쫓는 다큐멘터리들
BBC1을 통해 소개된 <Cars, Cops and Bailiffs(자동차, 순경, 그리고 집행관들)>은 BBC의 시청률에 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World's Wildest Police Video>와 같이 미국에서 성공한 범죄자 추격물은 최근까지 영국의 제작자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아이템이 아니었다. 특히 공영방송 BBC의 입맛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포맷이었다. 하지만, BBC의 다큐멘터리 편성 기획자인 벤 게일은 '이들 프로그램은 아드레날린이 넘친다. 이제 사람들은 방송으로부터 본능적인 반응을 얻기를 원한다'며 영국 시청자들의 입맛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가는 것을 인정했다. 그 뒤 ITV1에서도 '카메라를 든 경찰들(Cops with Cameras)'라는 프로그램으로 포맷 경쟁에 뛰어들었다.
2008년 1~4월 타블로이드 타큐멘터리 시청자 수
하지만, 과도한 타블로이드성 프로그램은 오히려 감소 추세다. 작년 ITV는 <Holiday Showdown>, <Driving Mum and Dad Crazy>, <Bad Lads Army>, <Neighbours from Hel>l, <Binge Drinkers>와 같은 과도한 프로그램들은 추가 제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ITV의 다큐멘터리 국장 제프 앤더슨(Jeff Anderson)은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ITV를 마치 ASBO(Anti Social Behavior Order) 채널로 보이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저급한 소재로 무리하게 프로그램을 만드는 대신 최근에는 유명 연예인을 다큐멘터리에 출연시키는 경우가 늘어났다. 보통 영국의 다큐멘터리는 주제에 맞는 전문가를 직접 대본 작업과 함께 진행을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교수, 작가, 평론가들이 직접 대본 작업과 진행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이 다큐멘터리를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전문 분야 지식은 물론이고 카메라에 적합한 외모, 대본 작업 능력, 진행 능력을 모두 갖추어야 시청자들에게 믿음과 제대로 된 정보를 줄 수 있다는 고집이었다. 하지만, 최근 비전문가나 기타 유명인들이 다큐멘터리의 진행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성적도 좋은 편이다. 괴짜 방송 진행자 루이 데로스(Louis Theroux)가 미국의 악명 높은 감옥에서 2주간 생활하는 모습을 다룬 BBC2의 <Louis Theroux Behind Bars>는 순간 시청자 수 553만 명을 기록했다. BBC4는 영국 고속도로 탄생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진행자로 스코틀랜드 배우 리차드 윌슨(Richard Wilson)을 낙점해 기대를 받고 있다. 히스토리 채널은 고대 유적지 스톤헨지(Stonehenge)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진행자로 코메디언 빌 베일리(Bill Bailey)로 출연시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개인이 좋아하는 장소로써 스톤헨지를 재해석하는 프로그램이다. 히스토리 채널은 일반인이 쉽게 동일화할 수 있는 유명인의 시각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인 내용을 전하는 다큐멘터리를 당분간 계속 제작할 전망이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 제작 전략은 일정 기간 동안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사람들이 공감하고, 재미를 느낄만한 방송 캠페인을 벌이는 편성을 묘를 발휘하는 것이다. 채널4는 올해 1월 집중 사육 닭 농장의 실태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거의 한 달간 집중 편성했다. 영국의 대표적인 요리사들 – 제이미 올리버(Jamie Oliver), 고든 램지(Gordon Ramsey), 휴 펀리(Hugh Fearnley)– 이 직접 진행한 이들 시리즈물은 대대적인 옥외 홍보물과 티저 광고를 통해 미리 잠재 시청자를 끌어 모았다.
<Jamie's Fowl Dinner>, <Hugh's Chicken Run>, <Gordon Ramsey: Cookalong live>와 같은 특이한 제목도 시청자의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한 몫 했다. 스튜디오에서 직접 집중 사육 닭 농장의 사육 현장을 재현하고, 이들이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 후 닭 요리를 스튜디오 관람객들에게 제공하거나, 진행자들이 몇몇 닭 농장을 방문하여 끔찍한 실태를 고발하기도 한 이들 프로그램들은 모두 300만 명 이상의 순간 시청자수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식탁에 오르는 닭고기의 가격이 왜 이렇게 싸지?"라는 일상을 뒤트는 질문을 교묘하게 붙들어 늘어진 이들 고발 다큐 시리즈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시장 논리 속에 숨은 파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성공적인 다큐멘터리 포맷도 시청률을 쫓는 다큐멘터리 제작 문화 속에서 자칫 매너리즘과 끊임없는 복제에 의해 원래의 좋은 의미가 퇴색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BBC2의 <부족(Tribe)>이 좋은 예다. BBC 웨일즈의 작은 프로젝트였던 <부족>은 진행자 브루스 패리가 직접 세계 곳곳의 부족들을 찾아가 그들과 생활하면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소수 부족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별다른 기대 없이 방영됐던 <부족>은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점차 많은 시청자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영국 방송 채널들은 <부족>의 아류작으로 가득 차게 됐다. 비슷한 시기 제작된 것만 20개 종류가 넘었다. 방송 전파의 낭비이자 창조적 에너지의 낭비라고 할만하다.
다큐멘터리와 디지털 플랫폼
디지털 매체의 등장으로 소수 TV채널의 독점 체제가 와해되고, 급속하게 증가한 채널의 수로 인해 과도한 시청률 경쟁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멀티플랫폼은 한편으로 그 불안감을 해소시켜줄 수 있는 출구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영국의 많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비록 디지털 플랫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는 있지만, 디지털 플랫폼의 강점을 기존 선형적 다큐멘터리에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형 방송사들 역시 디지털 플랫폼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면 앞으로 살아남지 못할지도 못한다는 일말의 불안감만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채널4는 올해 600만 파운드 규모(한화 120억 원)의 교육분야 콘텐츠 개발 예산의 3분의 2를 멀티미디어 콘텐츠 제작에 할애할 예정이다. 14-19세 학생과 선생들의 쌍방향 교육 콘텐츠에 대한 수요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또한, 지난 3월 발표한 방송사 장기 계획에서는 5,000만 파운드 규모의(한화 약 1000억 원) 디지털 콘텐츠 파일럿 기금을 조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기금이 디지털 컨텐츠 독립제작 시장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마치 1982년 채널4가 출범하면서 100% 외주라는 형태로TV독립제작사들을 전폭 지원하면서 지금의 활발한 독립제작 시장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과 같이, 디지털 컨텐츠 시장 형성의 촉진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계획 아래에서 독립제작사 'So Television'이 준비 중인 <Year Dot>는 채널4 에듀케이션을 위한 멀티 플랫폼 프로젝트 중 하나다. 웹과 TV를 통해 15명의 청소년들이 소시얼네트워킹 사이트인 My Space 등을 이용해 어떻게 자신들의 꿈을 실현하고, 고민을 해결하는지를 1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보여줄 예정이다. 15명의 인터넷 세대 젊은이들의 사회 진출 준비 과정을 근거리에서 보여주겠다는 취지다. 웹에서는 오는 6월 30일부터 이들의 삶을 공개하고 가을부터 TV로 방영할 예정이다.
BBC는 디지털 분야에 할당된 예산을 전통 TV제작사들과 디지털 컨텐츠 제작사들과 연결시키는데 많은 부분 할애할 것으로 보인다. BBC는 앞으로 TV제작 환경에만 익숙한 독립제작사들이 온라인 콘텐츠 제작 시장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 역할에 더 많은 노력을 투자할 예정이다. 전통 TV 제작자들과 새로운 디지털 콘텐츠 제작사들간의 만남을 주선하는 중매자 역할을 도맡을 생각인 것이다.
<Britain from Above>(www.bbc.co.uk/britainfromabove)와 같은 프로그램은 이러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 60분짜리 3편의 다큐멘터리는 컴퓨터 그래픽과 새로운 항공 촬영 기법으로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영국인의 삶을 조망할 예정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온라인으로 공개될 짧은 영상들 하나하나까지도 염두에 두고 제작됐다. 이러한 짧은 영상들은 온라인 접속자들이 원하는 형태로 재편집하거나 관심 분야에 따라 추려낼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형식으로 제공될 예정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이 기존 TV제작사들에 의해서만 주도되는 것은 아니다. 인터랙티브 컨텐츠 전문 제작사인 Magic Lantern은 2012년에 100주년을 맞는 타이타닉호의 이야기를 멀티 플랫폼 프로젝트로 구상 중에 있다. 웹에서 시작해 4년에 걸쳐 다양한 매체로 프로젝트의 가지를 뻗어갈 예정이다. 아직 BBC로부터 기획서에 승인을 받지는 못한 상황이지만, Magic Lantern의 관계자들은 불과 1년 전만해도 이러한 대형 멀티미디어 프로젝트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말하고 있다.
멀티 플랫폼 기반의 다큐멘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매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난 3월 방영되어 좋은 반응을 얻어낸 <White>는 이러한 기본에 충실했다는 평이다. 영국 내 백인 노동 계층의 역사와 변화를 담은 시리즈물인 <White>는 TV를 통해 방영된 선형적 네러티브와 함께 시청자가 온라인에서 BBC 영상 자료를 찾아 볼 수 있게 했다. 특별히 마련된 게시판에서는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고, BBC는 게시물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감정의 종류, 깊이, 그리고 지역적 분포도 등으로 시각화했다.
BBC의 <아마존>과 같은 프로그램은 촬영 당시부터 웹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공개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배우 이완 맥그리거와 찰리 부어맨의 <Long way Down>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로그램이 TV로 방영된 이후 시청자 설문 결과 시청자의 52%가 이미 웹을 통해 프로그램을 접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BBC에서는 이미 TV 매체를 포함하지 않는 순수 웹프로젝트에 대한 제작 지원도 고려하고 있지만, 이러한 결정이 앞으로 공영방송인 BBC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우려 때문에 결정을 유보하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타블로이드와 멀티미디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매체 환경 속에서 다큐멘터리 역시 변화하고 있다. <Planet Earth>와 같은 초대형 다큐멘터리에서부터 <Wife Swap> 등과 같은 실험성 강한 다큐멘터리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영국의 다큐 시장은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있다. 더 이상 높은 곳에서 정보를Push할 수 없게 되면서 시청자를 Pull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서 시청자를 당긴다는 것은 시청자가 옆집 친구가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를 듣고 싶듯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스며들게 하거나(친근한 연예인이 스톤헨지와 관련된 자신의 어릴 적 추억 등을 이야기하는 것), 놀이 공원에서 자유이용권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기구를 하나하나 타보는 것(웹으로 제공되는 파편적인 역사 자료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개인의 선택과 관점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최근 다큐멘터리들의 타블로이드화 현상이나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멀티플랫폼 기반의 다큐멘터리는 비슷한 곳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작성 : 성민제 (프리랜서 PD / UCL 영화학 석사, ludologist@gmail.com)